1부 만국의 개인주의자여, 싫은 건 싫다고 말하라
- 카테고리 없음
- 2017. 12. 17. 15:06
프롤로그
- 집단주의 성향이 강한 한국사회에서 투사가 되기 싫으면 연기자라도 되어야 하는 거다.
- 나와 아무 상관없는데도 지하주차장에서 일하며 힘겹게 공부하는 젊은이가 부잣집 사모님 앞에 잘못 없이 무릎 꿇고 고개 숙이는 꼴을 보면 피가 거꾸로 솟아 앞이 아득해진다. 한남대교를 지날 때마다 십 년 넘도록 마주치는 '실종된 송혜희 좀 찾아주세요' 현수막은 여전히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만든다. 그 현수막을 아이 아빠가 16년째 새것으로 바꿔 걸고 있다는 걸 뒤늦게 알고는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 어떤 때는 다른 것은 몰라도 고통만큼은 평등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부자도 권력자도 스타도 화려한 겉껍질 속에는 곪을 대로 곪은 상처가 가득했다. 건강 때문에 가족 때문에 자식 때문에 때로는 자기 자신 때문에 남모를 고통에 시달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링에 올라야 할 선수는 바로 당신, 개인이다
- 개인의 행복을 위한 도구인 집단이 거꾸로 개인의 행복의 잣대가 되어버리는 순간, 집단이라는 리바이어던은 바다괴물로 돌아가 개인을 삼킨다. 집단 내에서의 서열, 타인과의 비교가 행복의 기준인 사회에서는 개인은 분수를 지킬 줄 아는 노예가 되어야 비로소 행복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사다리 위로 한 칸이라도 더 올라가려고 아등바등 매달려 있다가 때가 되면 무덤으로 떨어질 뿐이다. 행복의 주어가 잘못 쓰여 있는 사회의 비극이다.
- 나는 감히 우리 스스로를 더 불행하게 만드는 굴레가 전근대적인 집단주의 문화이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근대적 의미의 합리적 개인주의라고 생각한다.
- '개인주의'라는 말은 집단의 화합과 전진을 저해하는 배신자의 가슴에 다는 주홍글씨였다. 나는 우리 사회 내에서가 아니라 법학 서적 속에서 비로소 그 말의 참된 의미를 배웠다. 그 불온한 단어인 '개인주의'야말로 르네상스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 문명의 발전을 이끈 엔진이었다.
- 개인주의란 유아적인 이기주의나 사회를 거부하는 고립주의가 아니다. 개인주의는 근데 계몽주의, 합리주의와 함께 발전하며 서구사회의 근간을 형성했다. 합리적 개인주의자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사회를 이루어 살 수 밖에 없고, 그것이 개인의 행복 추구에 필수적임을 이해한다. 그렇기에 사회에는 공정한 규칙이 필요하고, 자신의 자유가 일정 부분 제약될 수 있음을 수긍하고, 더 나아가 다른 입장의 사람들과 타협할 줄 알며, 개인의 힘만으로는 바꿀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타인들과 연대한다.
우리가 더 불행한 이유
- 한국사회는 이런 사회다. 실제 하는 일, 봉급도 중요하지만 '남들 보기에 번듯한지' '어떤 급인지'가 실체적인 중요성을 가진 사회인 거다. 나이 오십대 중년들의 사회에서 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모임에 나타나는 것은 메시지가 다른 것이다. 고위직 판사들이 기사 딸린 차로 나타나다가 어느 날부터 낡은 자가용을 자가운전하여 나타나기 시작하면 청렴한 집단이라고 좋은 평가를 받는 플러스 요인보다 사회적 위상이 예전보다 못한 집단으로 평가받는 마이너스 요인이 더 클 수 있다는 것이 우리 사회의 불편한 진실이다. 외관이 실질을 좌우하는 사회다.
- 자본주의사회인데 단순히 돈, 실리에 대한 추구를 넘어 지위재 집착이 심한 사회다. 수직선상 어느 위치에 있느냐, 아니 어느 위치에 있는 것처럼 보이느냐에 목을 매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 우리가 더 불행한 이유는 결국 우리 스스로 자승자박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마왕 혹은 개인주의자의 죽음
- 합리적 개인주의는 공동체에 대한 배려, 사회적 연대와 공존한다. 자신의 자유를 존중받으려면 타인의 자유도 존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톨레랑스, 즉 차이에 대한 용인, 소수자 보호, 다양성의 존중은 보다 많은 개인들이 주눅들지 않고 행복할 수 있게 하는 힘이다.
- 첨단을 걷는 IT강국이자 정치제도적인 민주화를 성공적으로 이룬 사회라지만, 정신적으로는 아직 근대적 자유주의조차 제대로 체화하지 못한 문화 지체를 겪는 곳에서 그 같은 사람은 끊임없이 시대와 불화를 낳는다.
인정투쟁의 소용돌이, SNS
- 글이란 묘해서 어떤 목적이 앞서거나 읽는 이에게 어떻게 보이고 싶은 욕구가 앞서는 듯 보이는 글은 감흥을 주기 어렵다. 진짜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계발의 함정
- 이 영화(위플래시)를 '나는 저만큼 충분히 노력하고 있는 걸까? 미치지 않고는 미치지 못한다는데......'라는 식의 자기계발 강박증으로 소비하는 것은 위험하고 유해한 감상법이라고 본다. ~ 물론 노력은 소중하고 필요한 것이지만 맹목적인 노력만이 가치의 척도는 아니다. 무엇을 위해 노력하는지 성찰이 먼저 필요하고, 노력이 정당하게 보상받지 못하는 구조에 대한 분노도 필요하다.
- 숨은 열등감과 비뚤어진 오만함이 병든 인간을 만들고, 병든 인간에게 주어진 과도한 권력은 비극을 낳는다.
광장에 내걸린 밀실
- 사십대 후반의 대학교수 부인이 죄수복을 입고 법정에 섰다. 간통 혐의다. 중매결혼 후 평생 바깥세상을 모른 채 두 아이를 키우며 관상용 화초처럼 살아온 사람이었다. ~ 강사는 방에 소형 카메라를 설치한 채 정사 장면을 촬영했다. 영상 속의 그녀는 촬영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부끄러움과 죄책감, 두려움이 교차하는 영상 속 그녀의 표정을 보자 나는 문득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고 있는 듯한 불편함을 느꼈다.
- 육십대 노신사가 간통 현행범으로 붙잡혀 왔다. 상대방은 오십대 후반의 여성, 우연한 재회 후 만남을 이어온 고향 마을 첫사랑이었다. ~ 자수성가하여 지역사회에서 봉사와 자선 활동을 끊임없이 해온 한 개인은 거기 없었다. 그저 플래시와 구둣발 사이에 무력하게 놓여 있는 고깃덩어리 한 덩이만 있었다. 주름진 얼굴, 튀어나온 배, 축늘어진 치부.
행복도 과학이다
- 진화심리학의 관점에서 행복을 쉽게 설명한 전문가의 책이 있다. 서은국 교수의 행복의 기원이다.
- 인간은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가장 많은 쾌감을 느끼는, 뼛속까지 사회적인 동물이었던 것이다. 돈은 어느 정도의 문화적 생활이 가능한 수준을 넘어서면 행복감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가장 행복감을 느끼는 그룹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사회성이 높은 외향적인 성격이었다.
-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것이다. 이건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옛말의 지혜와 같은 이야기다. 아무리 대단한 성취나 환희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고 무덤덤해지고 만다는 것이다. ~ 백억 원의 복권 당첨자 집단에 대한 추적연구 결과 불과 일 년 뒤에 이들의 행복감은 주변 이웃 수준으로 복귀했다. 이런 메커니즘 때문에 행복 전략에 있어 큰 것 한 방보다 다양하고 자잘한 즐거움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것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는 것이 심리학의 연구성과다.
-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대니얼 카너먼의 연구 결과인 연봉 상승에 따라 대체적으로 행복도도 상승하지만 문화적 생활이 가능한 수준인 7만 5000불이 넘어서면 행복에 영향이 없고 오히려 물질주의 성향 증가로 행복도가 떨어질 수도 있다는 통계를 본 후, 행복도 최적화 전략을 스스로 실험하기에 이른 것이다.
- 초등학교 졸업식에서는 책읽기상, 친구돕기상, 달리기상, 오만 이름의 상장을 모두에게 인심 좋게 나눠준다. 어느 쪽이 더 다수가 행복한 졸업식일까.
- 서은국 교수에 따르면 심리학계의 연구 결과 행복감을 예측하는 가장 중요한 문화적 특성은 개인주의고, 북미나 유럽 국가들의 행복감이 높은 이유는 높은 소득보다 개인주의적 문화 때문으로 본다.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국가들이 모여 있는 스칸디나비아 행복의 원동력은 넘치는 자유, 타인에 대한 신뢰, 그리고 다양한 재능과 관심에 대한 존중이라는 것이다.
- 타인과의 관계가 나의 선호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내 의사와 관계없이 강요되고, 의무와 복종의 위계로 짜이는데 이것이 행복의 원천이 될 리 없다. 갑을관계, 경쟁관계, 상명하복관계, 나를 평가하고 지배하는 관계, 내가 일방적으로 순종하고 모셔야 하는 관계에 있는 인간들이 과연 나에게 유용한 생존의 도구이기는 할까? 생존의 위협에 가깝지 않을까?
개인주의자의 소소한 행복
- '정치'라는 것이 어떤 논리적 연결고리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의문은 왜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 모든 직업이나 성취의 피라미드 꼭대기에 그 이름도 위대하신 '정치인'이라는 최종 포식자가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하는 점이다.
- 일본사회에 매이지 않은 채 로마에 일 년, 크레타 섬에 일 년, 세계를 뿌리 없는 부평초처럼 자유롭게 떠돌며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소설과 소소하고 유치한 수필을 끝도 없이 써대던 예전의 하루키다.
- 나는 소박하게 그리고 다양하게 일상 속의 작은 행복을 채워가는, 그러면서도 마음이 가는 일에는 주저 없이 자기 힘닿는 범위에서 참여하는 이들이 이끄는 곳으로 가고 싶다.
나는 사기의 공범이었을까
전국 수석의 기억
- 그 은혜를 입은 나로서는 그분의 전 재산 상당액(29만 원)을 무이자로 그분에게 빌려드릴 용의가 있을 정도다.
-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의 송옥렬 교수다.
개천의 용들은 멸종되는가
- 대니얼 골든이 이 책에서 주장하는 핵심을 요약하면, 미국 명문대들은 기부입학, 동문 자녀, 교수 자녀, 체육특기생 등의 특례입학을 통해 백인 특권층 자제 다수에게 특혜를 주고 있다는 것이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 현재까지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정의에 관한 원칙인 존 롤스의 정의론은 사회의 최소 수혜자를 배려하기 위한 불평등은 정의에 부합한다고하여 실질적 평등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우리 헌법이 지향하는 가치이기도 하다.
88학번
- 연극보고 록카페 다니느라 학교도 잘 안 나오던 주제에 '삼당 합당'으로 국민이 표 준 야당이 여당으로 통합되는 모양이 뭔가 상식을 우롱하는 짓이라고 느껴져 못 참겠다는 거다. 나 같은 일반 학우도 울컥하게 만드는 사건이었다.
- 무엇보다 서구 민주주의는 인간성에 대한 불신에서 출발한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인간의 이기심을 기본 전제로 하고, 권력자를 철저히 불신해 권력을 분리하여 상호 견제하도록 하는 사고방식 말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근간을 이루는 민법, 상법, 소송법을 공부하면 할수록 인간에 대한 불신에 기초해 정교하게 상호 견제가 가능하도록 만든 부분들, 애초에 인간 세상에서 최선은 성취하기 힘들다 보고 이해 당사자들의 투쟁을 통해 적정선에서 타협하도록 한 냉정함을 느낄 수 있었다.
20년 만에 돌아온 신림동 고시촌
- 지금 각자 소신껏 자기 할 일을 하며 나름의 소소한 행복들을 추구하며 살 수 있다. 스쿠버다이빙 사진전을 여는 변호사, 합창하는 판사, 무협소설 작가인 검사, 법조인이라는 직업은 나라는 존재의 일부에 불과하다. 법조 내에서 한 줄로 서서 경쟁하고 낙오할 것이 아니라 가족, 친구, 취미를 같이하는 동호인들, 함께 봉사하는 이들, 작지만 다양한 여러 사회 내에서 누구든 필요한 존재, 인정받는 존재로 살 수 있다.
이 글을 공유하기